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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있는 곳


일요일인 오늘은 저질체력인 둘째 시은이를 데리고 산행을 하는 것이었는데, 시은이 수준에 맞는 낮은 산인 아차산이 좋을 것 같아 아차산 산행을 강행했다. 약1도의 온도에 많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아차산을 오르기 위해 늦은 아침을 먹고 낮12시쯤 아차산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서서히 산행에 돌입했다. 얼마전 무의도 호룡곡산에 같이 갔던 이력이 있는 시은이는 그때보다 체력이 좀더 강화되어 좀 나은 산행을 했지만, 오르막에선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 힘들어 했다. 하지만 오늘의 쉽지 않은 산행을 무사히 마친 시은에게 고생했다고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오늘의 아차산 산행코스는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공장 - 평강교 -낙타고개 - 해맞이광장 - 아차산정상 - 긴고랑공원 - 평강교 - 만남의광장으로 회귀하는 코스로 약 3시간 정도 걸은 것 같다.


아차산에 생태공원에 가면 보이는 동상이 있는데, 바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다. 오늘은 고구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들은 어떻게 결혼을 했고, 이곳 아차산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고구려에 온달(?~590)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워낙 파리하고 어리석어 남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놀렸다. 한 편, 고구려의 평강왕(평원왕의 다른 이름)에게는 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워낙 잘 울어 “자꾸 울면 나중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다. 그 후 왕이 공주를 고씨 귀족과 결혼시키려 하자 “어찌 왕으로서 다른 말을 하느냐”며 궁을 나와 온달에게 갔다. 그리고 궁전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그 돈으로 온달을 공부시키고 무예까지 배우게 했다. 나중에 동맹 잔치 때 사냥 대회에서 온달이 우승하자 왕은 그가 바보 온달에, 자신의 사위임을 알고 크게 놀랐으며, 그 뒤 전쟁에서 온달은 큰 공을 세워 대형의 벼슬을 했고,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내려갔지만 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아차산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만남의 광장에서 출발하여 아차산행을 시작한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동상

아차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오늘의 아차산 산행코스는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공장 - 평강교 -낙타고개 - 해맞이광장 -

아차산정상 - 긴고랑공원 - 평강교 - 만남의광장으로 회귀하는 코스로 등산했다.

 

낙타고개를 통해서 아차산 정상방향인 왼쪽으로 직진한다.

 

아차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아차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해맞이 광장에서 본 강남방면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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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의 정경 파노라마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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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정상을 거쳐 용마산으로 가는 길 왼쪽에

아차산 긴고랑길로 가는 길이 있다.

시은이의 체력을 감안해서 용마산까지 가지않고

긴고랑길로 하산했다.

​아차산 긴고랑길은 처음 가는 길인데

나무가 우거져 여름에는 시원하게 등산할 것 같고

등산로 옆에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좋을 것 같다.

피톤치드 쉼터같은 장소도 만들어 놓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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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명예를 초개처럼 내던지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 바보에서 용맹한 장수로 변신한 온달. 온달의 애달픈 죽음과 이들의 생사를 초월한 교감.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얘기다.

온달은 설화 속 인물인가, 아니면 실존 인물인가. 설화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고구려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최상층 귀족도 아니었던 온달이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 여자인 평강공주가 결혼에 적극적이었다는 점, 바보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뛰어난 무공을 세워 대형이란 벼슬을 받은 점 등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온달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은 온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여 우스웠으나 속마음은 순박했다. 집이 무척 가난해 항상 먹을 것을 빌어 어미를 봉양했다. 찢어진 옷과 해진 신발로 거리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했다.”

바보 온달은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효성이 지극한 온달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밥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바보 온달은 고구려 도성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명물이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떼를 쓰면 ‘바보 온달한테 데려간다’고 겁을 주곤 했다.

평강공주는 고구려 제25대 평강왕(평원왕 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재위 559~590)의 외동딸이었다. 고집불통에 울보여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울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왕에게는 딸이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공주의 울음을 막을 요량으로 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이 다음에 커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됐다.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자 평강왕은 사윗감을 물색했다.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세력 있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후보 1순위였다. 그런데 공주는 바보 온달과 결혼하겠다고 생떼를 썼다. 왕이 윽박지르고 달래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공주는 궁궐을 나와 온달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온달은 바보? 그렇지 않다. 온달은 바보가 아니라 바보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어떤 아버지가, 그것도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단지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만으로 딸을 바보에게 시집보내겠는가.

온달은 신분이 하급 귀족 정도는 됐을 것으로 보이며, 신흥 귀족일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후 귀족들의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평강왕은 귀족 세력을 제압하기가 버거웠다. 귀족 세력이 강해질수록 왕권은 약해져만 갔다. 게다가 평강왕이 등극할 당시 고구려는 나라 밖에서도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신라는 진흥왕 재위 20년, 백제는 위덕왕 재위 6년째를 맞고 있었다. 당시 평강왕은 자신을 도와줄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그 무렵 평강왕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온달이었다. 온달은 나중에 대형이라는 높은 관직을 얻게 된다. 공적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대형이라는 관직에 오르려면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온달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무장이었다. 중국 후주 무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우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장군이 됐다. 따라서 평강왕이 온달을 신뢰해 예를 갖춰 정식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평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즉위 첫해에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결전이 불가피한 고구려로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무모한 싸움이었다. 영양왕은 내심 온달의 출정을 바랐고, 온달은 출정을 자원했다. 죽음을 예견했는지, 온달은 떠나면서 “계립현과 죽령 이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실제로 온달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신흥 귀족, 고승 장군 등에서 바보 온달의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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